김기덕 감독에게 2004년은 가장 행복한 해였다. 베를린과 베니스가 그를 환대했다. 미국 관객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 열광했다. 세상이 그에게 웃어주는 것 같았다. 그도 자주 웃었다. 하지만 그 뒤로 김기덕 감독은 줄곧 세상한테 배신을 당했다. 그의 방식으로 헤쳐나가기엔 대한민국은 너무 척박했다. 끝내 김기덕 감독은 검은 선글라스를 쓴 채 토론 프로그램에 등장해서 마지막 싸움을 벌였다.
김기덕 감독은 말했다. “가위 바위 보를 합시다. 지는 사람이 저기 가서 말을 걸고 오는 거야.” 저쪽 너머에는 김태희가 앉아 있었다. 프랑스 드골 공항이었다.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파리를 거쳐가야 했다.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김기덕 감독은 몇몇 기자들과 함께 움직였다. 무료했다. 그런데 저쪽에서 김태희가 나타났다. 우연이었다. 심심하던 차였다. 김기덕 감독은 기자들과 장난을 치자고 했다. 지는 사람이 가서 말을 걸고 오자는 내기였다. 소심한 기자들은 쭈뼛했다. 그런데 김기덕 감독이 졌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김태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선 말했다. “저, 김기덕이란 사람입니다. 영화감독입니다.” 무리로 돌아온 김기덕 감독은 말했다. “영화감독이라니까 알아보는 거 같긴 했는데 잘 모르겠네. 스페인에서 광고 찍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네. 같은 비행기래.” 김기덕 감독은 웃었다. 모두가 웃었다. 그의 트렁크 안엔 어제 저녁 베니스영화제 폐막식에서 탄 은사자상 트로피가 들어 있었다.
행복
김기덕 감독에겐 이제 좋은 일만 있을 거 같았다. 2004년은 그에게 최고의 해였다.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고 <빈집>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인 은사자상을 가져갔다. 베니스 관객들은 <빈집>에 열광했다. 첫 상영이 끝난 다음 기립 박수를 치지 않은 사람은 한국에서 온 기자들뿐이었다. 김기덕 감독이 큰 상을 수상할 거란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김기덕 감독은 수상을 위해 무대에 오르기 전에 객석에 앉아 있는 임권택 감독에게 큰 인사를 했다. 주류 영화계와는 담을 쌓은 것처럼 행동해온 김기덕 감독으로서는 의외의 모습이었다. 한국에서 온 기자들은 웅성거렸다. "이상하다. 김기덕 감독답지 않다. 이제 세상과 손을 잡겠다는 이야기인가?" 안 그래도 <섬>이나 <나쁜 남자> 때와 달리 그의 영화가 세상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었다.
그 무렵 그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미국에서 10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모으고 있었다. 북미 최대 영화제인 토론토영화제의 홍보이사인 가브리엘 겝은 그해 토론토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들 중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최고로 쳤다. 김기덕 감독에겐 정말 좋은 일만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한국에서도 정말 좋은 일만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김기덕 감독은 돌아오는 길에 기자들과 장난을 쳤다.
실망
그때가 김기덕 감독이 소탈하게 웃을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빈집>은 베니스영화제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4년 10월 15일 한국에서 개봉했다. <빈집>은 베를린과 베니스 영화제를 모두 석권한 감독의 영화였다. 지금은 <괴물>을 제작한 영화사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청어람은 당시만 해도 중견 배급사였다. 청어람은 <빈집>을 100개가 넘는 스크린에서 개봉시켰다. 스크린을 벌리면 관객이 들 것도 같았다.
김기덕 감독은 주연배우 이승연과 개봉 첫날 상영관을 돌며 무대 인사를 했다. <빈집>으로 그는 관객을 만나고 싶어했다. 하지만 개봉 첫날 객석은 절반도 안 차 있었다. 그나마도 김기덕 감독을 반기는 눈치도 아니었다. 김기덕 감독이 이승연을 캐스팅한 건 노이즈 마케팅을 노린 고도의 전술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 무렵 이승연은 위안부 뮤직 비디오 파문에 휩싸여 연예인 생명이 위태로웠다. 사실 이승연보다 먼저 캐스팅 물망에 올랐던 건 이미연이었다. 하지만 이미연의 소속사인 싸이더스HQ는 노출 때문에 마다했다. 사실 이승연 역시 처음엔 출연을 거절했다. 이승연은 전략이 아니라 막다른 선택이었다. 하지만 사실과 상관 없이 여론이 김기덕 감독을 심판했다. 베니스에서 김기덕 감독과 이승연은 여유로웠다. 하지만 한국에선 상황이 달랐다. 이승연은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 했다. 김기덕 감독은 <빈집>이 처참하게 외면 받는 걸 지켜봐야 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100개 스크린에서 고작 2주 동안 상영한 끝에 9만 명을 모으는 데 그쳤다. <빈집>의 강영구 PD는 말한다. “<사마리아> 때도 그랬다. 그 무렵 배급사 쇼이스트는 100개쯤 펼치면 설마 20만 명 안 들겠냐고 그랬다. 그런데 정말 안 들었다. <빈집>때도 우리는 설마했다.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관객들에게 상처를 받았다. 배급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영화 시스템에 대해서도 상처를 받았다.” 김기덕 감독쪽 입장에서 보면 배급사들은 영화를 가져다가 성의 없이 풀어버렸다. 별반 고민 없이 100개 스크린을 벌렸다가 안 되면 순식간에 내려버려서 남는 건 넝마가 된 영화뿐이었다. 강영구 PD는 말한다. “김기덕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 배급하겠다는 곳은 많다. 돈을 크게 안 들여도 어디 가서 회사의 필모그래피는 되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김기덕 감독 영화를 배급한 영화사라고 하면 알아주니까.” <빈집>은 결국 텅 빈 집이 됐다. 김기덕 감독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배신
세상은 김기덕 감독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2004년 말 김기덕 감독은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접한다. 강영구 PD는 말한다. “일산에 있는 김기덕 필름으로 연락이 왔다. <빈집>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선정될 거라는 소식이었다. 그런 줄 알고 있었다. 마침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미국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어차피 김기덕 감독은 해외에서 제작비를 끌어와야 하는 처지였다. 그때까진 유럽이나 일본 제작사에서 도움을 받았다. 혹시나 미국과도 인연이 닿지 않을까 싶었다.” 김기덕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제작비를 확보하는 게 늘 어려웠다.
제작비를 벌어들이려면 국내 시장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러나 국내 시장 환경은 너무 척박했다. 시장에 맞춰진 영화가 아니면 한국 관객들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1000만 관객이라는 숫자는 그런 천편일률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 안에서 빈틈을 찾는다는 건 어려웠다. 그래서 아카데미 영화상이라는 건 또 다른 기회일지도 몰랐다. 베니스나 베를린 영화제는 예술 영화상이다. 아카데미라면 다르다. 그런데 얼마 뒤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다른 소식이 전해져 왔다. 강영구 PD는 말한다. “그러니까 결과가 다르다는 내용이었다. <빈집> 대신 <태극기 휘날리며>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추천됐다는 얘기였다.” 아카데미가 상업적인 영화상인 탓에 <태극기 휘날리며>가 훨씬 더 수상 확률이 높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강영구 PD는 다르게 해석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미국 수출과 개봉을 준비 중이었다. 강제규 감독도 미국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아카데미라는 날개를 달면 유리했다. <빈집>은 이미 상업적으로 거덜난 상태였다. <태극기 휘날리며>에 힘을 실어주자는 얘기였다. 김기덕 감독은 강영구 PD에게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주류 영화계가 나를 배척한다. 그들끼리 모든 걸 짜고 친다. 공고한 시스템이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나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이런 게 어디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김기덕 감독은 한국영화계의 바깥에서 영화를 만들어왔다. 주류가 아니었다. 주류 영화계를 둘러싼 벽은 점점 두터워지고 있었다. 상업적인, 전략적인 이유를 들어 팔이 안으로 굽고 있었다. <빈집>이 흥행에서 침몰하는 걸 보며 김기덕 감독은 이미 충분히 상처를 입었다. 2004년만큼 김기덕 감독이 뉴스메이커였던 시기는 없었다. 하지만 칸에서 수상한 다음 스타가 된 박찬욱 감독과 달리 김기덕 감독에게는 여전히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김기덕 감독은 스스로 스타가 된 경우였다. 박찬욱이나 봉준호, 강제규 감독은 시스템이 낳은 스타였다. 그건 시스템과 그들이 어울린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은 아니었다. 그건 결국 타협이 불가능하단 얘기였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논쟁이 그런 경우였다.
좌절
김기덕 감독은 <활>을 만들면서 앞으로는 시스템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어차피 한국영화의 주류는 그의 명성을 이용하려들 뿐 그를 품에 안으려고 하지 않았다. 스스로 자기 길을 걸어야 했다. <활>은 일본 자본을 벌어서 만들어졌다. 어차피 한국의 어떤 영화사한테도 빚이 없었다. 어차피 김기덕 감독은 한국영화계의 변방에서 혼자 힘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런데 극장과 배급 시스템은 중심의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다. 그동안은 그들과 손을 잡아서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김기덕 감독이 직접 극장에서 영화를 개봉하기로 했다. 사실 김기덕 감독이 <활>을 만들었을 때도 극장 개봉을 주선하겠다는 배급사는 많았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은 그들이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봤다. 주류 영화에 길들여진 관객들은 1000만 영화를 만들 수는 있을 지언정 20만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다. 김기덕 감독은 <활>을 들고 직접 극장을 찾아다녔다. 다른 사람 손을 빌리느니 직접 극장을 만나서 진정 원하는 극장에만 영화를 풀겠다는 얘기였다.
김기덕 감독은 비교적 소규모인 시너스 극장과 계약을 맺는다. 시너스 극장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자기 영화의 체인 안에서만 개봉하되 분명하게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말은 지켜지지 못했다. 김기덕 감독은 대형 멀티플렉스들보다는 작은 극장들이 오히려 영화를 보호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틀렸다. 하루도 제대로 틀지 않고 영화를 내려버렸다. 극장이 작은 탓에 홍보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김기덕 감독은 불가능한 한계를 넘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대세는 넘어가버린 상황이었다. <활>은 고작 1100 명이 들었다.
진실
그 무렵 김기덕 감독은 대형 투자사나 제작사, 배급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CJ엔터테인먼트는 김기덕 감독에게 대형 영화의 연출을 맡아볼 것을 권했다. 김기덕은 어떤 식으로든 상업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름이었다. CJ엔터테인먼트도 김기덕 감독과 영화를 찍고 싶어했지만 그에게 전권을 주지는 않았다. 사실 수십억 원짜리 영화를 김기덕 감독 스타일대로만 찍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런 기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가 상업적으로 돌아선다면 화젯거리가 될 터였다. 김기덕 감독은 마다했다. 이미 겪은 게 있었다. 시스템에선 개인은 이용만 당할 뿐이었다. 결국 한국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늘 주류와의 마찰을 뜻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도, 영화를 개봉시키는 것도 늘 한계였다. 김기덕 영화의 내용부터가 그랬다. 강영구 PD는 말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제작하는 과정만큼은 너무나 행복하다. 하지만 문제는 늘 영화를 다 찍은 다음에 생긴다. 그걸 돌파하는 게 가장 힘들다.”
<활>의 처참한 실패는 김기덕 감독에게는 큰 교훈을 줬다. 영화는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있어도 주류가 점령한 지금의 시스템을 혼자 힘으로 돌파하는 건 불가능했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관객들은 이미 멀리 가버렸다. 1000만 관객이 나오긴 쉬워도 작은 영화의 흥행이 힘든 곳에서 영화를 하기란 버거웠다. 그렇다고 주류 영화권과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김기덕이라는 브랜드를 언제든지 폐기처분할 사람이었다. 한국은 영화 하기엔 참 나쁜 곳이었다.
고집
<시간>을 시작하면서 김기덕 감독은 강영구 PD에게 말했다. "이 영화는 국내 개봉을 안 시킬 수도 있다." 강영구 PD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의 뜻대로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강영구 PD는 나름대로 여러 배급사들을 만났다. <시간> 제작은 늘 그랬듯 순조로웠다. 5억 원 남짓한 예산으로 한 달 동안 준비하고 한 달 동안 촬영하고 두 달 동안 후반작업을 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배급사들과의 이야기는 그렇게 순조롭지가 않았다. 배급사들은 영화를 본 다음 결정하겠다거나, 1억 원 정도 판권료를 주고 배급 수수료까지 주면 대행을 해주겠다는 식이었다. 사실 1억 원이면 비디오나 DVD만 팔아도 남는 돈이었다. 결국 극장 개봉은 대충 시키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그러다가 시장에선 나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김기덕 감독이 판권료를 두둑하게 챙기려고 배짱을 튕기고 있다는 소리였다. 역시나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개봉이 문제였다.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김기덕 감독은 일산에 있는 김기덕 필름 사무실 구석에 앉아서 자주 생각에 잠기곤 했다. 김기덕 필름이라곤 하지만 그곳은 다락방 정도였다. 김기덕 감독의 자리는 4층 건물 꼭대기 다락방에서도 구석 한편이었다. 그곳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시나리오도 수정하고 이야기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심지어 편집까지 했다. 스태프들은 방바닥에 누워서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서 일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과연 개봉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카를로비 바리에 <시간>이 개막작으로 선정됐을 때도 개봉은 불투명했다. 그는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김기덕 감독은 미련 때문에 영화를 억지로 시장에 내놓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1000만 명
2000년 무렵 김기덕 감독은 <섬>과 <나쁜 남자>를 만들면서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그는 베니스영화제에서는 축복을 받았지만 한국에 돌아오면 그를 기다리는 건 싸늘한 평단의 시선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 <나쁜 남자>는 뜻밖에도 흥행에서 성공한다. 그건 <나쁜 남자>를 마초적이고 에로틱한 마케팅으로 포장한 덕이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중에선 가장 많은 70만 명을 모았다. 김기덕 감독과 오래 알고 지낸 저예산 영화 배급사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는 말한다. “<나쁜 남자>의 흥행 성공이 대중에게 김기덕이라는 브랜드를 각인시킨 꼴이 됐다. 비호감 감독으로 말이다. 오히려 흥행이 안 됐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차라리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흥행했다면 인식이 달라졌겠지.”
김기덕 감독은 세상과 맞서는 과정에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그는 마초 감독이었고 영화계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그를 터부시했다. 김기덕 감독도 그걸 느끼고 있었다. 소통하려고 해도 다들 도망가버렸다. 무슨 일을 해도 관심을 끌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그러더니 김기덕 감독은 어느 순간부턴 장사 안 되는 예술영화 감독의 대명사처럼 돼버렸다. 언론들은 저예산 영화, 작은 영화의 흥행 실패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기사를 생산할 때면 늘 김기덕 감독을 팔았다. 김기덕 감독은 지긋지긋해 했다. 관객을 구걸하는 감독처럼 비쳐졌기 때문이다. 무슨 앙탈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던 거다. 그런 김기덕 감독에 대한 인식은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질 않았다. 1000만 명이 보는 영화라면 따라 봤고 다들 싫어하는 감독이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다. 김기덕 감독은 그런 편견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김기덕 감독은 강영구 PD와 술을 마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1000만 시대가 우리한테는 더 나쁜 환경을 만들어줄 거다.” 그 말이 맞았다.
자존심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가 김기덕 감독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인연 때문이었다. 김기덕 감독은 평소에도 늘 스폰지에서 개봉하는 작은 영화를 보러 다녔다. <메종 드 히미코> 같은 영화를 롱런시키는 스폰지의 경험은 시너스처럼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증거가 될 수도 있었다. 조성규 대표는 말한다. “감독님한테 그랬다. 많이 들게는 못해도 볼 사람은 보게 만들 수 있다.” 조성규 대표는 헤이리에 있는 김기덕 감독의 집에 찾아가서 설득했다. 작지만 세련되게 개봉할 생각이었다. 사실 김기덕 감독은 국내 시장을 돌파하기 위한 거의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장동건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나온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한국은 그에겐 고향이지만 무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씨네21>에서 <시간>을 보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조성규 대표는 말한다. “마음은 고마웠다. 그런데 그게 김기덕 감독이 정작 원하던 게 아니었다. 또다시 저예산 영화의 상징처럼, 시장에서는 안 통하는 불구의 감독처럼 그려지기 시작했던 거다. 그게 싫어서, 관객한테 구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싫어서 국내 개봉을 안 하겠다고 한 건데 결국 또 그렇게 포장되고 있었다.” 관객 운동이 일어났다. <시간>을 보기 위한 모임이 결성됐다. 하지만 정작 영화 관계자들은 씁쓸했다. 이미 한국 영화시장은 괴물처럼 커져버렸다. 1999년 <박하사탕>이 관객 운동을 끌어냈을 때만 해도 한국 영화시장은 작고 야무졌다. 적은 관객들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관객 운동은 시장에 아무런 변화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게 돼버렸다. 다시 보기 운동은 결국 시장에서 패배한 불쌍한 영화들에 대한 동정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조성규 대표는 말한다. “감독님의 마음을 돌리려면 그의 영화가 동정을 받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 고착화된 시스템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했다. 그건 패배주의나 동정주의를 벗어나 당당하게 관객과 만난다는 의미였다.”
싸움
김기덕 감독은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기자들의 질문이 천편일률적이란 거였다. 기자들은 늘 같은 것만 물었다. 저예산 영화, 한국 시장에서 살아남기, 이런 말들이었다. 하지만 국내 개봉을 결심한 이상 영화를 알려야 하긴 했다. 조성규 대표는 김기덕 감독에게 몇몇 매체와의 인터뷰를 제안했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은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했다. 그냥 한 번에 끝내버리겠다는 심사였다. <시간>의 기자 간담회는 평지풍파의 시작이었다. 언론은 김기덕 감독을 이용하려고 들었다. 마침 <괴물>이 흥행하고 있었다. 다들 <괴물>이 만들어내는 이런 저런 현상들을 쫓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게 없었다. 결국 언론이 잡은 건 <괴물>이 너무 많은 스크린을 잡은 게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먼저 이문식이 도마 위에 올랐다. <플라이 대디>가 <괴물>에 묻혀버리자 그는 “<괴물>이 너무 많은 스크린을 잡은 거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은 당장 언론에게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그러자 이문식은 두문불출해버렸다. 김기덕 감독에게도 역시 <괴물>에 관련된 질문이 들어왔다. 그러자 김기덕 감독은 예상했다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괴물>의 수준과 관객의 수준이 만난 결과다.” 기자들은 일제히 그 부분을 대서특필했다. 조성규 대표는 말한다. “그래서 일찍 기자 간담회를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끝이 나질 않았다.”
논란은 끝나지를 않았다. 그건 기자들 때문이었다. <괴물>은 여전히 가파르게 흥행하고 있었다. 기사 거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관객 스코어 중계방송은 식상했다. 배우들 인터뷰, 관계자들 인터뷰도 다 했다. 이제 할말이 없었다. 김기덕 감독을 자꾸 물고 늘어졌다. 다시 김기덕 감독은 언론에 의해 저예산 영화의 독립군이자 피해자이자 동정의 대상이자 독불장군으로 변해갔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김기덕 감독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은 거절했다. 사실 몇 달 전부턴 아예 핸드폰을 없애버린 터였다.
끝
지난 8월 16일 아침 강영구 PD는 김기덕 감독한테서 메일을 한 통 받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뉴스에 내가 100분 토론에 나간다는 얘기 들었지? 그냥 할말만 하고 올게.” 강영구 PD는 안 그래도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전화가 없는 그에게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김기덕 감독은 결국 손석희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또 다른 프로그램인 <MBC 100분 토론>에는 출연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주제는 김기덕 감독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결국 <괴물>에 대한 김기덕 감독의 발언이 그를 그 자리에까지 밀어올린 셈이었다. <괴물> 논란에 김기덕 감독마저 휩쓸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표면적인 이유였다. 김기덕 감독을 토론 자리에 서게 만든 건 <빈집> 이후 김기덕 감독이 통과해온 시간들 때문이었다. <빈집> 이후 김기덕 감독은 부단하게도 한국을 통과하고자 애써왔다. 그러나 김기덕 감독이 그럴수록 상황은 꼬여갔다. 주류는 그를 배척했고 관객은 그를 외면했다. 그럴 거면 상업영화를 만들라는 핀잔을 들었다. <괴물>에 대한 김기덕 감독의 발언은 그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는 토론 자리에까지 나서게 됐다. 강영구 PD는 말한다. “아마 이게 마지막일 거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버텼는데 한 줌의 관객이라도 설득을 못 시키면, 그럴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다면 결국 다시는 관객이나 언론과 소통하려고 하지 않을 거다.”
100분 토론은 지루한 공방을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그 자리에서 김기덕 감독은 선글라스를 쓴 채 자신의 영화가 시장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을 설파했다. 함께 토론에 나왔던 강한섭 교수는 말한다. “그는 우리를 가지고 논 거다. 사실 김기덕 감독도 꽤 전략적인 사람이다. 그는 지금 한국영화의 환경이 치유불능이며 소수의 권력자들만 득세하고 변방에선 늘 주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권력 구조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그 나름대로 세상에 저항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그는 토론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나오고 블랙유머로 일관했던 셈이다.” 김기덕 감독은 다시 한번 <시간>을 홍보하기 위해 언론 플레이를 한 것이 아니냐는 독설에 시달렸다.
김기덕 필름 사무실에 <월스트리트 저널> 아시아판의 한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기자는 말했다. “김기덕 감독이 특별히 영향을 받은 감독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 그런 내용의 기사를 쓰고 싶다.” 전화를 받은 강영구 PD는 대답했다. “ 지금 그런 한가로운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인터넷이 난리가 났어요. <괴물>과 관련한 감독님의 발언 때문이죠. 모르셨어요?” 기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김기덕 감독이 그런 논란에 휩싸여 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정말 김기덕 감독이 무슨 영화를 좋아하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사실 <월스트리트 저널>의 궁금증이 정상이었다. 한 감독의 작품 세계를 궁금해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서 김기덕의 영화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게 왜곡돼 있다.
지난 21일 김기덕 감독은 <연합뉴스>에 보낸 이메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관객들의 질타를 계기로 차분히 제 영화와 영화 작업을 돌아보니 참으로 한심하고 이기적인 영화를 만들었고, 한국 사회의 어둡고 추악한 모습을 과장하여 관객에게 강요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불쾌감을 갖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기형적으로 돌출해 열등감을 먹고 자란 괴물임을 알았습니다. 제 영화는 어느 관객의 말처럼 모두 쓰레기입니다. <시간>도 수입사가 계약을 해지해준다면 개봉을 멈추고 싶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한국 관객의 진심을 깨닫고 조용히 한국영화계에서 물러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김기덕 감독은 반짝 관심과 언론의 장난질 속에서 오랜 동안 싸워왔다. 그러나 이젠 그 싸움마저도 끝나 가고 있다.
PREMIERE 신기주
김기덕 감독은 말했다. “가위 바위 보를 합시다. 지는 사람이 저기 가서 말을 걸고 오는 거야.” 저쪽 너머에는 김태희가 앉아 있었다. 프랑스 드골 공항이었다.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파리를 거쳐가야 했다.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김기덕 감독은 몇몇 기자들과 함께 움직였다. 무료했다. 그런데 저쪽에서 김태희가 나타났다. 우연이었다. 심심하던 차였다. 김기덕 감독은 기자들과 장난을 치자고 했다. 지는 사람이 가서 말을 걸고 오자는 내기였다. 소심한 기자들은 쭈뼛했다. 그런데 김기덕 감독이 졌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김태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선 말했다. “저, 김기덕이란 사람입니다. 영화감독입니다.” 무리로 돌아온 김기덕 감독은 말했다. “영화감독이라니까 알아보는 거 같긴 했는데 잘 모르겠네. 스페인에서 광고 찍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네. 같은 비행기래.” 김기덕 감독은 웃었다. 모두가 웃었다. 그의 트렁크 안엔 어제 저녁 베니스영화제 폐막식에서 탄 은사자상 트로피가 들어 있었다.
행복
김기덕 감독에겐 이제 좋은 일만 있을 거 같았다. 2004년은 그에게 최고의 해였다.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고 <빈집>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인 은사자상을 가져갔다. 베니스 관객들은 <빈집>에 열광했다. 첫 상영이 끝난 다음 기립 박수를 치지 않은 사람은 한국에서 온 기자들뿐이었다. 김기덕 감독이 큰 상을 수상할 거란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김기덕 감독은 수상을 위해 무대에 오르기 전에 객석에 앉아 있는 임권택 감독에게 큰 인사를 했다. 주류 영화계와는 담을 쌓은 것처럼 행동해온 김기덕 감독으로서는 의외의 모습이었다. 한국에서 온 기자들은 웅성거렸다. "이상하다. 김기덕 감독답지 않다. 이제 세상과 손을 잡겠다는 이야기인가?" 안 그래도 <섬>이나 <나쁜 남자> 때와 달리 그의 영화가 세상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었다.
그 무렵 그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미국에서 10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모으고 있었다. 북미 최대 영화제인 토론토영화제의 홍보이사인 가브리엘 겝은 그해 토론토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들 중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최고로 쳤다. 김기덕 감독에겐 정말 좋은 일만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한국에서도 정말 좋은 일만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김기덕 감독은 돌아오는 길에 기자들과 장난을 쳤다.
실망
그때가 김기덕 감독이 소탈하게 웃을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빈집>은 베니스영화제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4년 10월 15일 한국에서 개봉했다. <빈집>은 베를린과 베니스 영화제를 모두 석권한 감독의 영화였다. 지금은 <괴물>을 제작한 영화사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청어람은 당시만 해도 중견 배급사였다. 청어람은 <빈집>을 100개가 넘는 스크린에서 개봉시켰다. 스크린을 벌리면 관객이 들 것도 같았다.
김기덕 감독은 주연배우 이승연과 개봉 첫날 상영관을 돌며 무대 인사를 했다. <빈집>으로 그는 관객을 만나고 싶어했다. 하지만 개봉 첫날 객석은 절반도 안 차 있었다. 그나마도 김기덕 감독을 반기는 눈치도 아니었다. 김기덕 감독이 이승연을 캐스팅한 건 노이즈 마케팅을 노린 고도의 전술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 무렵 이승연은 위안부 뮤직 비디오 파문에 휩싸여 연예인 생명이 위태로웠다. 사실 이승연보다 먼저 캐스팅 물망에 올랐던 건 이미연이었다. 하지만 이미연의 소속사인 싸이더스HQ는 노출 때문에 마다했다. 사실 이승연 역시 처음엔 출연을 거절했다. 이승연은 전략이 아니라 막다른 선택이었다. 하지만 사실과 상관 없이 여론이 김기덕 감독을 심판했다. 베니스에서 김기덕 감독과 이승연은 여유로웠다. 하지만 한국에선 상황이 달랐다. 이승연은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 했다. 김기덕 감독은 <빈집>이 처참하게 외면 받는 걸 지켜봐야 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100개 스크린에서 고작 2주 동안 상영한 끝에 9만 명을 모으는 데 그쳤다. <빈집>의 강영구 PD는 말한다. “<사마리아> 때도 그랬다. 그 무렵 배급사 쇼이스트는 100개쯤 펼치면 설마 20만 명 안 들겠냐고 그랬다. 그런데 정말 안 들었다. <빈집>때도 우리는 설마했다.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관객들에게 상처를 받았다. 배급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영화 시스템에 대해서도 상처를 받았다.” 김기덕 감독쪽 입장에서 보면 배급사들은 영화를 가져다가 성의 없이 풀어버렸다. 별반 고민 없이 100개 스크린을 벌렸다가 안 되면 순식간에 내려버려서 남는 건 넝마가 된 영화뿐이었다. 강영구 PD는 말한다. “김기덕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 배급하겠다는 곳은 많다. 돈을 크게 안 들여도 어디 가서 회사의 필모그래피는 되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김기덕 감독 영화를 배급한 영화사라고 하면 알아주니까.” <빈집>은 결국 텅 빈 집이 됐다. 김기덕 감독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배신
세상은 김기덕 감독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2004년 말 김기덕 감독은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접한다. 강영구 PD는 말한다. “일산에 있는 김기덕 필름으로 연락이 왔다. <빈집>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선정될 거라는 소식이었다. 그런 줄 알고 있었다. 마침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미국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어차피 김기덕 감독은 해외에서 제작비를 끌어와야 하는 처지였다. 그때까진 유럽이나 일본 제작사에서 도움을 받았다. 혹시나 미국과도 인연이 닿지 않을까 싶었다.” 김기덕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제작비를 확보하는 게 늘 어려웠다.
제작비를 벌어들이려면 국내 시장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러나 국내 시장 환경은 너무 척박했다. 시장에 맞춰진 영화가 아니면 한국 관객들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1000만 관객이라는 숫자는 그런 천편일률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 안에서 빈틈을 찾는다는 건 어려웠다. 그래서 아카데미 영화상이라는 건 또 다른 기회일지도 몰랐다. 베니스나 베를린 영화제는 예술 영화상이다. 아카데미라면 다르다. 그런데 얼마 뒤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다른 소식이 전해져 왔다. 강영구 PD는 말한다. “그러니까 결과가 다르다는 내용이었다. <빈집> 대신 <태극기 휘날리며>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추천됐다는 얘기였다.” 아카데미가 상업적인 영화상인 탓에 <태극기 휘날리며>가 훨씬 더 수상 확률이 높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강영구 PD는 다르게 해석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미국 수출과 개봉을 준비 중이었다. 강제규 감독도 미국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아카데미라는 날개를 달면 유리했다. <빈집>은 이미 상업적으로 거덜난 상태였다. <태극기 휘날리며>에 힘을 실어주자는 얘기였다. 김기덕 감독은 강영구 PD에게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주류 영화계가 나를 배척한다. 그들끼리 모든 걸 짜고 친다. 공고한 시스템이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나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이런 게 어디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김기덕 감독은 한국영화계의 바깥에서 영화를 만들어왔다. 주류가 아니었다. 주류 영화계를 둘러싼 벽은 점점 두터워지고 있었다. 상업적인, 전략적인 이유를 들어 팔이 안으로 굽고 있었다. <빈집>이 흥행에서 침몰하는 걸 보며 김기덕 감독은 이미 충분히 상처를 입었다. 2004년만큼 김기덕 감독이 뉴스메이커였던 시기는 없었다. 하지만 칸에서 수상한 다음 스타가 된 박찬욱 감독과 달리 김기덕 감독에게는 여전히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김기덕 감독은 스스로 스타가 된 경우였다. 박찬욱이나 봉준호, 강제규 감독은 시스템이 낳은 스타였다. 그건 시스템과 그들이 어울린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은 아니었다. 그건 결국 타협이 불가능하단 얘기였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논쟁이 그런 경우였다.
좌절
김기덕 감독은 <활>을 만들면서 앞으로는 시스템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어차피 한국영화의 주류는 그의 명성을 이용하려들 뿐 그를 품에 안으려고 하지 않았다. 스스로 자기 길을 걸어야 했다. <활>은 일본 자본을 벌어서 만들어졌다. 어차피 한국의 어떤 영화사한테도 빚이 없었다. 어차피 김기덕 감독은 한국영화계의 변방에서 혼자 힘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런데 극장과 배급 시스템은 중심의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다. 그동안은 그들과 손을 잡아서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김기덕 감독이 직접 극장에서 영화를 개봉하기로 했다. 사실 김기덕 감독이 <활>을 만들었을 때도 극장 개봉을 주선하겠다는 배급사는 많았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은 그들이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봤다. 주류 영화에 길들여진 관객들은 1000만 영화를 만들 수는 있을 지언정 20만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다. 김기덕 감독은 <활>을 들고 직접 극장을 찾아다녔다. 다른 사람 손을 빌리느니 직접 극장을 만나서 진정 원하는 극장에만 영화를 풀겠다는 얘기였다.
김기덕 감독은 비교적 소규모인 시너스 극장과 계약을 맺는다. 시너스 극장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자기 영화의 체인 안에서만 개봉하되 분명하게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말은 지켜지지 못했다. 김기덕 감독은 대형 멀티플렉스들보다는 작은 극장들이 오히려 영화를 보호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틀렸다. 하루도 제대로 틀지 않고 영화를 내려버렸다. 극장이 작은 탓에 홍보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김기덕 감독은 불가능한 한계를 넘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대세는 넘어가버린 상황이었다. <활>은 고작 1100 명이 들었다.
진실
그 무렵 김기덕 감독은 대형 투자사나 제작사, 배급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CJ엔터테인먼트는 김기덕 감독에게 대형 영화의 연출을 맡아볼 것을 권했다. 김기덕은 어떤 식으로든 상업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름이었다. CJ엔터테인먼트도 김기덕 감독과 영화를 찍고 싶어했지만 그에게 전권을 주지는 않았다. 사실 수십억 원짜리 영화를 김기덕 감독 스타일대로만 찍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런 기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가 상업적으로 돌아선다면 화젯거리가 될 터였다. 김기덕 감독은 마다했다. 이미 겪은 게 있었다. 시스템에선 개인은 이용만 당할 뿐이었다. 결국 한국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늘 주류와의 마찰을 뜻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도, 영화를 개봉시키는 것도 늘 한계였다. 김기덕 영화의 내용부터가 그랬다. 강영구 PD는 말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제작하는 과정만큼은 너무나 행복하다. 하지만 문제는 늘 영화를 다 찍은 다음에 생긴다. 그걸 돌파하는 게 가장 힘들다.”
<활>의 처참한 실패는 김기덕 감독에게는 큰 교훈을 줬다. 영화는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있어도 주류가 점령한 지금의 시스템을 혼자 힘으로 돌파하는 건 불가능했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관객들은 이미 멀리 가버렸다. 1000만 관객이 나오긴 쉬워도 작은 영화의 흥행이 힘든 곳에서 영화를 하기란 버거웠다. 그렇다고 주류 영화권과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김기덕이라는 브랜드를 언제든지 폐기처분할 사람이었다. 한국은 영화 하기엔 참 나쁜 곳이었다.
고집
<시간>을 시작하면서 김기덕 감독은 강영구 PD에게 말했다. "이 영화는 국내 개봉을 안 시킬 수도 있다." 강영구 PD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의 뜻대로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강영구 PD는 나름대로 여러 배급사들을 만났다. <시간> 제작은 늘 그랬듯 순조로웠다. 5억 원 남짓한 예산으로 한 달 동안 준비하고 한 달 동안 촬영하고 두 달 동안 후반작업을 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배급사들과의 이야기는 그렇게 순조롭지가 않았다. 배급사들은 영화를 본 다음 결정하겠다거나, 1억 원 정도 판권료를 주고 배급 수수료까지 주면 대행을 해주겠다는 식이었다. 사실 1억 원이면 비디오나 DVD만 팔아도 남는 돈이었다. 결국 극장 개봉은 대충 시키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그러다가 시장에선 나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김기덕 감독이 판권료를 두둑하게 챙기려고 배짱을 튕기고 있다는 소리였다. 역시나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개봉이 문제였다.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김기덕 감독은 일산에 있는 김기덕 필름 사무실 구석에 앉아서 자주 생각에 잠기곤 했다. 김기덕 필름이라곤 하지만 그곳은 다락방 정도였다. 김기덕 감독의 자리는 4층 건물 꼭대기 다락방에서도 구석 한편이었다. 그곳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시나리오도 수정하고 이야기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심지어 편집까지 했다. 스태프들은 방바닥에 누워서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서 일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과연 개봉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카를로비 바리에 <시간>이 개막작으로 선정됐을 때도 개봉은 불투명했다. 그는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김기덕 감독은 미련 때문에 영화를 억지로 시장에 내놓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1000만 명
2000년 무렵 김기덕 감독은 <섬>과 <나쁜 남자>를 만들면서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그는 베니스영화제에서는 축복을 받았지만 한국에 돌아오면 그를 기다리는 건 싸늘한 평단의 시선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 <나쁜 남자>는 뜻밖에도 흥행에서 성공한다. 그건 <나쁜 남자>를 마초적이고 에로틱한 마케팅으로 포장한 덕이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중에선 가장 많은 70만 명을 모았다. 김기덕 감독과 오래 알고 지낸 저예산 영화 배급사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는 말한다. “<나쁜 남자>의 흥행 성공이 대중에게 김기덕이라는 브랜드를 각인시킨 꼴이 됐다. 비호감 감독으로 말이다. 오히려 흥행이 안 됐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차라리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흥행했다면 인식이 달라졌겠지.”
김기덕 감독은 세상과 맞서는 과정에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그는 마초 감독이었고 영화계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그를 터부시했다. 김기덕 감독도 그걸 느끼고 있었다. 소통하려고 해도 다들 도망가버렸다. 무슨 일을 해도 관심을 끌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그러더니 김기덕 감독은 어느 순간부턴 장사 안 되는 예술영화 감독의 대명사처럼 돼버렸다. 언론들은 저예산 영화, 작은 영화의 흥행 실패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기사를 생산할 때면 늘 김기덕 감독을 팔았다. 김기덕 감독은 지긋지긋해 했다. 관객을 구걸하는 감독처럼 비쳐졌기 때문이다. 무슨 앙탈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던 거다. 그런 김기덕 감독에 대한 인식은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질 않았다. 1000만 명이 보는 영화라면 따라 봤고 다들 싫어하는 감독이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다. 김기덕 감독은 그런 편견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김기덕 감독은 강영구 PD와 술을 마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1000만 시대가 우리한테는 더 나쁜 환경을 만들어줄 거다.” 그 말이 맞았다.
자존심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가 김기덕 감독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인연 때문이었다. 김기덕 감독은 평소에도 늘 스폰지에서 개봉하는 작은 영화를 보러 다녔다. <메종 드 히미코> 같은 영화를 롱런시키는 스폰지의 경험은 시너스처럼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증거가 될 수도 있었다. 조성규 대표는 말한다. “감독님한테 그랬다. 많이 들게는 못해도 볼 사람은 보게 만들 수 있다.” 조성규 대표는 헤이리에 있는 김기덕 감독의 집에 찾아가서 설득했다. 작지만 세련되게 개봉할 생각이었다. 사실 김기덕 감독은 국내 시장을 돌파하기 위한 거의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장동건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나온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한국은 그에겐 고향이지만 무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씨네21>에서 <시간>을 보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조성규 대표는 말한다. “마음은 고마웠다. 그런데 그게 김기덕 감독이 정작 원하던 게 아니었다. 또다시 저예산 영화의 상징처럼, 시장에서는 안 통하는 불구의 감독처럼 그려지기 시작했던 거다. 그게 싫어서, 관객한테 구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싫어서 국내 개봉을 안 하겠다고 한 건데 결국 또 그렇게 포장되고 있었다.” 관객 운동이 일어났다. <시간>을 보기 위한 모임이 결성됐다. 하지만 정작 영화 관계자들은 씁쓸했다. 이미 한국 영화시장은 괴물처럼 커져버렸다. 1999년 <박하사탕>이 관객 운동을 끌어냈을 때만 해도 한국 영화시장은 작고 야무졌다. 적은 관객들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관객 운동은 시장에 아무런 변화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게 돼버렸다. 다시 보기 운동은 결국 시장에서 패배한 불쌍한 영화들에 대한 동정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조성규 대표는 말한다. “감독님의 마음을 돌리려면 그의 영화가 동정을 받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 고착화된 시스템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했다. 그건 패배주의나 동정주의를 벗어나 당당하게 관객과 만난다는 의미였다.”
싸움
김기덕 감독은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기자들의 질문이 천편일률적이란 거였다. 기자들은 늘 같은 것만 물었다. 저예산 영화, 한국 시장에서 살아남기, 이런 말들이었다. 하지만 국내 개봉을 결심한 이상 영화를 알려야 하긴 했다. 조성규 대표는 김기덕 감독에게 몇몇 매체와의 인터뷰를 제안했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은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했다. 그냥 한 번에 끝내버리겠다는 심사였다. <시간>의 기자 간담회는 평지풍파의 시작이었다. 언론은 김기덕 감독을 이용하려고 들었다. 마침 <괴물>이 흥행하고 있었다. 다들 <괴물>이 만들어내는 이런 저런 현상들을 쫓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게 없었다. 결국 언론이 잡은 건 <괴물>이 너무 많은 스크린을 잡은 게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먼저 이문식이 도마 위에 올랐다. <플라이 대디>가 <괴물>에 묻혀버리자 그는 “<괴물>이 너무 많은 스크린을 잡은 거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은 당장 언론에게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그러자 이문식은 두문불출해버렸다. 김기덕 감독에게도 역시 <괴물>에 관련된 질문이 들어왔다. 그러자 김기덕 감독은 예상했다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괴물>의 수준과 관객의 수준이 만난 결과다.” 기자들은 일제히 그 부분을 대서특필했다. 조성규 대표는 말한다. “그래서 일찍 기자 간담회를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끝이 나질 않았다.”
논란은 끝나지를 않았다. 그건 기자들 때문이었다. <괴물>은 여전히 가파르게 흥행하고 있었다. 기사 거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관객 스코어 중계방송은 식상했다. 배우들 인터뷰, 관계자들 인터뷰도 다 했다. 이제 할말이 없었다. 김기덕 감독을 자꾸 물고 늘어졌다. 다시 김기덕 감독은 언론에 의해 저예산 영화의 독립군이자 피해자이자 동정의 대상이자 독불장군으로 변해갔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김기덕 감독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은 거절했다. 사실 몇 달 전부턴 아예 핸드폰을 없애버린 터였다.
끝
지난 8월 16일 아침 강영구 PD는 김기덕 감독한테서 메일을 한 통 받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뉴스에 내가 100분 토론에 나간다는 얘기 들었지? 그냥 할말만 하고 올게.” 강영구 PD는 안 그래도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전화가 없는 그에게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김기덕 감독은 결국 손석희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또 다른 프로그램인 <MBC 100분 토론>에는 출연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주제는 김기덕 감독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결국 <괴물>에 대한 김기덕 감독의 발언이 그를 그 자리에까지 밀어올린 셈이었다. <괴물> 논란에 김기덕 감독마저 휩쓸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표면적인 이유였다. 김기덕 감독을 토론 자리에 서게 만든 건 <빈집> 이후 김기덕 감독이 통과해온 시간들 때문이었다. <빈집> 이후 김기덕 감독은 부단하게도 한국을 통과하고자 애써왔다. 그러나 김기덕 감독이 그럴수록 상황은 꼬여갔다. 주류는 그를 배척했고 관객은 그를 외면했다. 그럴 거면 상업영화를 만들라는 핀잔을 들었다. <괴물>에 대한 김기덕 감독의 발언은 그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는 토론 자리에까지 나서게 됐다. 강영구 PD는 말한다. “아마 이게 마지막일 거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버텼는데 한 줌의 관객이라도 설득을 못 시키면, 그럴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다면 결국 다시는 관객이나 언론과 소통하려고 하지 않을 거다.”
100분 토론은 지루한 공방을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그 자리에서 김기덕 감독은 선글라스를 쓴 채 자신의 영화가 시장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을 설파했다. 함께 토론에 나왔던 강한섭 교수는 말한다. “그는 우리를 가지고 논 거다. 사실 김기덕 감독도 꽤 전략적인 사람이다. 그는 지금 한국영화의 환경이 치유불능이며 소수의 권력자들만 득세하고 변방에선 늘 주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권력 구조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그 나름대로 세상에 저항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그는 토론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나오고 블랙유머로 일관했던 셈이다.” 김기덕 감독은 다시 한번 <시간>을 홍보하기 위해 언론 플레이를 한 것이 아니냐는 독설에 시달렸다.
김기덕 필름 사무실에 <월스트리트 저널> 아시아판의 한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기자는 말했다. “김기덕 감독이 특별히 영향을 받은 감독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 그런 내용의 기사를 쓰고 싶다.” 전화를 받은 강영구 PD는 대답했다. “ 지금 그런 한가로운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인터넷이 난리가 났어요. <괴물>과 관련한 감독님의 발언 때문이죠. 모르셨어요?” 기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김기덕 감독이 그런 논란에 휩싸여 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정말 김기덕 감독이 무슨 영화를 좋아하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사실 <월스트리트 저널>의 궁금증이 정상이었다. 한 감독의 작품 세계를 궁금해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서 김기덕의 영화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게 왜곡돼 있다.
지난 21일 김기덕 감독은 <연합뉴스>에 보낸 이메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관객들의 질타를 계기로 차분히 제 영화와 영화 작업을 돌아보니 참으로 한심하고 이기적인 영화를 만들었고, 한국 사회의 어둡고 추악한 모습을 과장하여 관객에게 강요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불쾌감을 갖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기형적으로 돌출해 열등감을 먹고 자란 괴물임을 알았습니다. 제 영화는 어느 관객의 말처럼 모두 쓰레기입니다. <시간>도 수입사가 계약을 해지해준다면 개봉을 멈추고 싶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한국 관객의 진심을 깨닫고 조용히 한국영화계에서 물러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김기덕 감독은 반짝 관심과 언론의 장난질 속에서 오랜 동안 싸워왔다. 그러나 이젠 그 싸움마저도 끝나 가고 있다.
PREMIERE 신기주
-by 남군,
느끼는 바가 크다.
괴물이 나오게 되면서 그냥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게...
언론 플레이에 휘둘리게 되면서...
예술은 그저 인간의 감성을 읽어내려가면서
사람에게 메세지를 전달하는..그런 순수한 루트일줄만 알았는데..
영화가 이렇게 잠식 되어버리는게 아닌가 하고..............
정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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